(1) 초기 항공작전 1948년 10월 19일 여순사건이 발생하자 육군은 즉시 토벌작전을 위한 전투부대를 편성하였는데, 이 작전에 비행부대도 참가하였다. 비행부대는 1948년 10월 20일 출동명령을 받고 조종사와 정비사 각 10명이 L―4기 10대에 분승, 광주비행장에 착륙하여 같은 해 10월 22일부터 10월 31일까지 지원작전을 하였다. 이 작전은 긴급연락·정찰·지휘관수송·폭탄투하 등의 임무를 수행했는데, 항공기와 지상군 간의 통신방법이 전혀 없어 통신통(通信筒)에 연락문서를 넣어 공중투하하는 방법을 이용하였으므로 어려움이 많았다. 작전중 조종사 후방석에 정비사를 태우고 정비사의 손으로 박격포탄과 수류탄을 공중투하했는데, 폭도를 살상하는 효과보다는 심리적 위협수단으로 사용하였다. 그 한 예로 반란군들이 양민을 학살하는 소위 인민재판을 공중에서 정찰하고 초저공으로 재판장 근처에 수류탄을 투하하면서 위협하자, 혼란이 일어나게 되어 많은 양민들이 위기를 모면하였다. 1949년 1월 24일부터 4월 14일까지 제주도사건에는 L―5기 6대가 출동, 양날개에 2.36인치 로켓 2문을 장착, 지상군을 지원했는데, 정찰·전단살포·지휘관수송 등의 임무를 수행했으며, 포탄과 소총탄 탄약을 뽑아서 만든 사제폭탄을 목측(目測)으로 투하하였다. 1949년 2월 12일 지리산지구 및 태백산지구에 준동하는 공비소탕작전에 출동했고, 5월 26일 옹진지구의 충돌사건에도 출동하여 정찰·전단살포·지휘관수송, 부상병과 약품수송 등 지상작전을 지원하였다. 1950년 6월 25일 6·25전쟁이 일어났을 때 공군 보유항공기는 22대를 가동할 수 있었을 뿐 전투기는 한 대도 없었다. 공산군의 전투기가 난무하는 가운데 한국공군은 AT6 및 L형 항공기로 공산군의 상공에서 맨손으로 폭탄을 던지면서 후퇴하는 지상군을 지원하였다. 7월 2일 미군에게서 F51 전투폭격기(일명 무스탕) 10대를 이양받아 그 다음 날부터 출격에 나서 남하하는 적전차 및 차량과 보급품 집적소 등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첫 출격에서 비행단장 대령 이근석(李根錫)이 전사하는 등 피해가 크자 출격보다는 훈련에 중점을 두기로 하고 대구기지를 미 공군에게 이양한 다음, 진해기지로 이동하여 진해기지와 김해기지를 사용하면서 훈련에 열중하였다. 한국 조종사들의 전투력이 향상되고 낙동강 방어선에서 적의 공격이 가열되자, 부득이 8월 15일부터 비행훈련을 중지하고 낙동강 방어선지역의 적 이동병력과 보급품집적소 등에 대한 127회의 출격작전을 감행하였다. 또한, UN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병참선을 차단당한 적군이 패주하자 공군비행단은 진해에서 대구, 대구에서 여의도, 여의도에서 평양 미림비행장으로 이동하면서 항공작전을 수행하였다. 1950년 10월 중순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선이 다시 후퇴하게 되자, 공군비행단은 미림에서 여의도, 여의도에서 대전, 대전에서 제주도, 제주도에서 사천 등지로 이동하면서 지상군에 대한 지원작전을 계속하였다. 한편, 대전기지 이동시 남아있던 중령 김신을 비롯한 일부 조종사와 정비사 등이 주축이 되어 미 공군의 지원을 받아 백구부대를 편성, 항공작전을 계속하였으며, 이는 뒷날 한국공군 단독출격작전을 수행하는 데 크게 기여한 결과를 낳았다. 1951년 8월 1일, 사천기지주둔 공군비행단을 제1전투비행단으로, 정찰비행부대를 제2정찰비행전대로 개편, 조종사 연성훈련(鍊成訓鍊)에 주력하면서 지리산지구 공비토벌작전을 지원하였다. 같은 해 9월 28일 제1전투비행단 제10전투비행전대를 강릉기지로 전진시켜 10월 11일부터 역사적인 한국공군 단독출격으로 인제 동북방 ‘당장곡’ 공격을 필두로 인제·통천·연천·회양·고성·현리·원산·안변·신고산 등지의 도로·철도·보급물집적소·교량 등을 목표로 총 500여 회의 출격을 감행하였다. 단독 출격 작전을 개시한 이후 1952년 1월 15일 미 공군이 500여 회의 출격으로도 절단하지 못한 승호리철교(평양 동쪽 10㎞ 지점)를 단 14회의 출격으로 차단, 한국공군의 전투기량을 과시하였다. 같은 해 8월 29일 UN군의 항공압박작전(AirPressure)의 일환으로 감행한 평양 대폭격에도 36회 출격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성립될 때까지 한국공군은 적의 후방보급로 차단, 적 지상군공격 및 공군지원작전 등 8,267회 유효출격을 감행하였으며, 39명의 100회 이상 출격조종사를 배출하였다. 최초의 100회 출격기록자는 중령 김두만(金斗萬)이었으며, 최고 출격기록자는 대위 유치곤(兪致坤)으로 203회의 출격을 기록하였다. 6·25전쟁중 주요 작전기지는 강릉·사천·대구 등지였으며, 강릉은 한국공군이 단독출격작전을 수행했던 유일한 기지였다. 강릉기지에서 중동부전선 일대의 출격작전을 수행하던 제1전투비행단 제10전투비행전대는 F51 전폭기 39대를 포함하여 각종 항공기 70여 대를 보유하게 되자, 1953년 2월 15일 제10전투비행전대를 기간으로 제10전투비행단을 창설, 전방 출격작전을 전담하였다. 사천기지 주둔 제1전투비행단은 제1훈련비행단으로 개편하여 조종사 양성훈련에 주력하였다. 이와 같이, 전쟁중 한국공군은 출격작전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교육·훈련을 강화하여 조종사 양성에 힘썼으며, 모든 기구와 체제를 점차 발전시켜 휴전 당시 공군병력은 1만1461명(장교 1,382명, 준위 140명, 장교후보생 1,036명, 사병 8,903명)에 F51D 전폭기 79대를 주역으로 한 총 110대의 항공기를 보유하게 되었다. (2) 전술공군 6·25전쟁 개전 초 며칠 동안을 제외하고는 UN공군에게 제공권을 완전히 빼앗겼던 북한공군은 휴전협정을 무시하고 공군력 증강에 주력하였으며, 이에 한국공군은 상대적인 공군력 확보를 위하여 공군현대화에 박차를 가하였다. 1955년 4월 이후 한국공군은 C46수송기·F86세이버제트전투기·T33제트훈련기 등을 인수하였으며, 1956년 4월 제10전투비행단이 제트화를 완료하였고, 교체된 F51 전폭기와 C46 수송기를 주축으로 1955년 10월 15일 조종사들의 전투훈련을 담당하기 위하여 대구기지에서 제5혼성비행단을 창설하였다. 이보다 앞서 항로통신부대와 관제경보부대도 창설, 모든 체제를 정비하였으며, 1957년 중앙항로교통관제소(ARTCC)를 미공군에서 인수, 영공 내를 비행하는 모든 항공기의 항로관제업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1958년부터는 레이다기지도 인수, 운영함으로써 영공 내를 비행하는 모든 비행체에 대하여 전술요격 관제경보 능력도 구비하게 되었다. 같은 해 8월 김포기지에서 한국공군에서는 두번째인 제11전투비행단을 창설하였고, 1960년 2월 F86D 전천후 요격기를 인수받았으며, 1961년 7월 작전사령부를 창설하여 모든 전술부대의 작전체제를 통합, 일원화하게 되었다. 1962년 5월 동양최대 규모의 항공창(航空廠)을 건설하여 각종 최신 항공기의 정비지원과 후방지원 임무를 담당하였다. 1965년 4월 F5 초음속제트 전투폭격기(Freedomfighter)를 인수하였고, 1969년 8월 신예 초음속 전천후 전투폭격기 F4D 팬텀기를 인수하였다. 한편, 이에 앞서 1966년 6월 대형수송기 C54 항공기를 미 공군에서 이양받아 한국∼베트남 간의 전술적인 공수업무를 담당하였으며, 1970년 9월 대간첩작전용 해상초계기 S2 항공기를 인수받아 운영하다가 1976년 1월 해군으로 이관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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